답사이야기

일제 수탈의 역사 현장을 찾아서

이미영전북 2022. 3. 3. 16:22

2022. 2.28

답사경로: 만경강 새창이다리~임피역~발산초 석물~이영춘가옥

 

 3.1절 하루 전날인 2월 마지막 날,

 군산지역(옛 옥구지역) 일제 수탈의 현장을 돌아보며 선열들의 독립운동 정신을 되새겨보는 시간을 가졌다.

 첫번째 답사지는 만경강 하류에 위치한 새창이다리(군산시 대야면~김제시 청하면)이다. 새창이 다리는 1933년 건설된 국내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시멘트 다리로도 유명하다. 그보다 앞서 목천포다리(1928)가 있었지만 철거되었고, 새만금이 생기기 전까지 망둥어, 숭어 낚시 장소로 장관을 이뤘던 새창이다리는 다행히 살아남았다. 새창이다리는 일제강점기에 김제평야에서 수탈한 쌀, 농산물을 군산항으로 실어나르기 위해 건설되었다. 옥구, 김제 일대 악질적인 일본지주들은 70% 이상의 고율의 소작료를 받으며 이 곳 농민들에게서 수탈한 농산물들을 새창이다리를 통해 군산으로 운반했을 것이리라.  

 우리 일행은 대야쪽에서 새창이다리를 걸어서 김제 청하로 넘어갔다. 완주 동상 밤샘에서 발원하여 삼례, 춘포를 거치며 몸을 불린 만경강은 새창이다리가 있는 하류에서는 강폭이 제법 넓다. 다행히 김제시에서는 새창이다리와 신창진(신창나루)에 대한 안내석을 설치해놓았다. 옛부터 신창진은 인근에서 거둬들인 조세를 조창으로 운반하던 교통요지로 고사포, 동자포, 춘포로 물길이 연결되며 수많은 배가 드나들던 만경강의 큰 나루터였다고 한다. 지금은 인적이 끊긴 신창나루터에 서서 만경강을 삶의 터전으로 살아냈던 민초들의 모습을 그려본다.(대동여지도에 만경강은 '사수'로, 신창진 등 포구들이 자세히 표시되어 있음) 다음으로 신창진 부근 '춘우정김선생투수순절추모비'를 찾았다. 신창나루는 1910년 나라를 일제에 빼앗기고 항거하다 군산으로 압송되던 유학자 춘우정 김영상선생이 투수한 장소이다. 끝내 김영상선생은 군산감옥에서 9일동안 단식하던 중 절명하였다. 이 역사적 사건은 조선말 초상화가로 유명한 채용신이 '춘우정투강순절도'란 그림으로 남겨놓았다. 난 이번 답사를 통해서야 우국지사 김영상선생을 자세히 알게 되었고 역사적인 그림도 마주할 수 있었다. 우리는 신창진 나루터 부근 식당에서 점심을 맛있게 먹고 다시 새창이다리를 건너와 다음 답사지인 임피역으로 향했다.

새창이다리(김제 청하방면)
신창진에서 바라본 새창이다리
춘우정 김선생 투수 순절 추모비(김제 청하)

 지금은 폐쇄되었지만 임피역은 군산선이 지나는 역이다. 군산선은 1912년 익산에서 군산까지 이어진 철로로 당시 목포역을 종착역으로 하는 호남선(1911착공, 1914완공)과 연결되었다. 또 전라선 일부(익산-전주)가 1914년에 협궤로 건설되었으니 한일합방이 되자마자 전북의 곡창지대는 모두 철로로 연결되어 군산항으로 수탈한 쌀을 운반하는 기능을 했다. 현재 임피역사는 1936년 지은 건축물로 국가등록문화재로 등록되었다. 임피 지역은 지금은 군산시 임피면으로 작은 고을이지만 고려시대엔 군산지역의 주 현이었고, 조선시대 임피현은 13개면을 거느린 광활한 면적을 지닌 고장으로 1914년 임피면으로 행정개편이 되어 옥구군으로 병합되었다. 이 때 임피현의 관할이었던 동부 지역이 서수면이 되었고 해방후 주민들은 임피중학교를 옥구농민항일항쟁지인 서수면 이엽사농장 터에 설립하였다. 서수는 또한 부모님이 결혼해서 살던 곳으로 우리 형제 6남매중 5명이 나고 자란 곳이다.(여섯째인 필자만 이리출생) 부모님 두 분이 다 임피초교를 다니셨고, 1958년 익산(구 이리)으로 이사오기까지 임피면, 서수면은 부모님과 형제자매들의 삶이 깃든 고장이었다. 그래서 이곳 지명들은 어릴적 수없이 들어와서 또 얼마나 친근한가! 술산리 임피역에 도착하니 입구에 옥구항일농민항쟁비가 제일 먼저 눈에 띈다. 1927년 서수면에 있던 일제 이엽사농장의 고율 소작료에 시달리던 농민조합 청년들이 소작료 인하를 요구하자 악덕지주는 들어주기는 커녕 장태성대표를 군산으로 압송한다. 이 소식을 들은 농민들은 임피역사에서 장태성을 구출하고, 나머지 주동자를 석방하라며 서수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항쟁을 이어간다. 역사 마당에 기차전시관이 자리하고 있어서 임피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었다. 그 곳에서 임피면의 인물로 애국자 이인식선생(1901-1963)의 독립운동과 농촌교육운동 정신을 다시 되새겨보았다. 이인식 선생은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르셨고 전재산을 상해임시정부에 헌납하고 일본,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을 하셨다. 그리고 해방후에는 임피중 설립과 농촌 교육에 헌신하신 교육자이시다.(임피중교정에 흉상이 있음) 내게 임피역은 어릴적 익산에서 기차를 타고 군산 외가에 가며 지나던 역, 학창시절엔 임피, 대야에서 기차로 통학하던 친구들이 많았던 추억의 장소이기도 하다.

임피역사 앞에 선 언니
옥구항일농민항쟁비(임피중소재)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발산초등학교(군산 개정면 소재)이다. 발산초에는 완주 봉림사지터에서 가져왔다는 저 유명한 군산 발산리오층석탑(고려시대, 보물 276호)과 군산 발산리 석등(고려시대, 보물 234호)이 있는 곳이다. 학교에 불교 문화재인 보물이 2점이나 있는 이유는 일제강점기의 아픈 역사 때문이다. 발산초터는 일제 강점기 일본인 시마타니 야소야가 운영하던 농장이었다. 시마타니는 쌀 수탈도 모자라 각 지에 있는 우리나라 문화재들을 끌어다 모아놓았다. 발산초등학교 뒷뜰에 가보니 아름답고 웅장한 석물들이 줄지어 서있다. 제 자리는 아니지만 당당하게 서있는 발산리 오층석탑, 용과 구름무늬가 새겨진 독창적인 발산리 석등은 국사 교과서에도 보았던 모습이다. 석물 옆에는 당시 일본인 지주의 귀중품 보관용 창고(등록문화재182호)가 남아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귀중한 문화재들이 일본으로 강제 반출됐으며, 이를 지켜봐야 했던 당시 민초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해방후 지역민들은 일본인 농장 자리에 아이들을 교육하는 학교를 세웠고, 그래서 발산초는 보물을 두 점이나 가지고 있는 학교가 되었다. 석물 앞, 예쁜 학교 건물이 보인다.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군산 발산리 오층석탑
발산초 뒷뜰 석물들, 군산 발산리 석등

 오늘 답사 마지막 장소는 군산간호대학 부근, 옛 개정병원 언덕에 있는 이영춘가옥(군산 개정면 소재)이다. 웅장한 은행나무가 서있는 언덕위에 서구식의 근대 가옥이 서있다. 쌍천 이영춘박사(1903-1980)는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리며 농촌의료봉사, 개정중앙병원과 개정간호학교, 일심영아원을 설립하며 평생을 농촌지역 의료 발전을 위해 헌신한 분이다. 이영춘가옥은 1920년대 일제 강점기 군산지역과 신태인 화호지역의 일본인 대지주였던 구마모토 리헤이가 농장관리를 위해 지은 별장 주택으로 서양식, 한식, 일식 등 여러 건축양식이 혼합되어 있다. 해방후에 구마모토 농장 의무실 진료소장을 지낸 이영춘박사가 거주했으며 현재는 이영춘박사의 삶의 족적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영춘박사는 평남 용강 출신으로 세브란스의전, 대한민국 1호 의학박사가 되었지만 농민 진료를 위해 1935년 구마모토농장에 소속된 3000여가구 2만여명의 소작농 가족을 돌보는 자혜의원 원장으로 부임하였다. 이후 평생을 농민 진료, 농촌 위생에 대한 연구, 보건교육기관 설립, 결핵 관리, 기생충 박멸 등에 힘쓰며 지역주민들에게 큰 혜택을 주었다. 이영춘박사는 우리 가족에게도 참 고마운 분이다. 아버지께서 젊은 시절, 간디스토마에 걸린 적이 있는데 이영춘박사 치료 덕분에 무사히 나으셨다는 얘기를 여러번 들었었다. 이영춘가옥을 나오니 어느새 석양이 붉게 물들고 있다. 일제 수탈의 역사현장 답사에 언니와 친구 안선이가 동행해서 더 행복한 하루였다. 그리고 오늘 답사한 역사 현장과 부모님의 숨결이 남아있는 임피에서 하루를 묵기로 한 것도 참 잘 한 일이다. 

이영춘가옥
임피숙소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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