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인의 기상을 느끼며 다녀온
발해만 요하기행
이미영(전북지역교육연구소 대표)
여름방학을 맞이한 전북지역 초중고 교사 30여명과 함께 전북교과체험학습연구회가 주관하고 북원태학 장현근선생님이 안내하는 ‘발해만 요하기행’을 5박6일(2017.8.10-8.15)간 다녀왔다. 꼭 한번 함께 해보고 싶은 답사였기에 두 번의 사전연수도 참여하였고 답사 일정이 굉장히 힘들다는 소문을 들었던지라 각오를 단단히 하고 중국 대련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학교 밖에 나온 이후 모처럼 전북의 교사들과 함께 한 기행이어서 내겐 든든하고 행복한 날들이었다. 이번 기행 내내 그동안 무지와 편협한 역사관에 사로잡혀있던 나를 확인하는 기회이기도 하였다. 또 우리 민족의 고대 상고사, 통일적다민족국가론에 의한 중국의 동북공정의 확인, 급변하는 동북아정세 속의 통일과제 등을 생각하고 토론하며 보낸 시간은 더없이 소중하였다. 이 글에서는 우리 기행단이 5박6일간 답사했던 곳 중 일부만을 싣게 되었다. 그리고 답사지의 내용은 북원태학 장현근선생의 설명과 전북교과통합체험학습연구회가 발간한 기행안내서 ⌜요동백팔십리 청석령 디나거나 초하구 어드매오⌟(장현근 엮음)를 참고로 했음을 밝혀 둔다.
(청석령 고개 마루에서 )
압록강과 고구려 박작성
압록강은 길이가 약 790㎞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강이다. 그러기에 압록강 하구에는 약 200여개의 하중도가 있으며 그 중 120여개의 섬이 북한 영토로 되어 있다. 우리에게는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으로 잘 알려진 위화도, 최근 중국 투자로 개발되고 있는 북한의 황금평 역시 압록강 하중도이다. 단동의 압록강에서 탄 유람선이 북한 영토인 구리도와 우적도 사이를 지날 때엔 북녘산하가 손에 닿을 듯 가까웠고 신의주도 보였다. 갈 수 없는 조국의 반쪽 산하를 바라보며 우리 일행은 북한산 들쭉술로 먹먹한 가슴을 달래며 이 시대 통일로 가는 길은 무엇일까 얘기하였다.
6.25사변 때 미군의 폭격으로 끊어진 압록강단교에 서서 바라보는 조중우의교에는 북한으로 들어가는 트럭과 기차가 보이고 북한에서 나오는 관광버스도 보인다.
압록강변에 우뚝 솟아있는 지형지세에 고구려 박작성이 있다. 비 오듯 땀을 흘리며 박작성에 올라 바라보는 압록강과 만주 벌판은 더없이 아름답다. 그러나 박작성을 중국은 명나라 때 쌓은 호산장성으로 명명하며 만리장성의 종착지로 둔갑 선전하고 있는 동북공정의 역사 왜곡을 확인하니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후손들에게 분단된 나라에서 우리의 역사까지 기억하고 지키지 못한다면 이보다 더 큰 죄는 없을 것이다. 이 시대 교사들의 올바른 역사의식이 무엇보다도 중요함을 깨닫는다.
(압록강단교에서)
(유람선을 타고 압록강에서 손에 잡힐듯 가까이 북녘땅을 보다)
(급경사인 박작성을 오르니 압록강 너머 북녘땅이 한 눈에 들어온다.)
아일랜드인 조지 루이스 쇼와 이륭양행터
우리 독립운동사에 꼭 기억해야 할 인물이 있다면 바로 아일랜드인 조지 루이스 쇼(1880-1943) 선생이다. 단둥 시가지에 있는 이륭양행 건물은 지금은 유치원 건물로 사용되고 있었으며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었다. 이륭양행은 목숨을 걸고 우리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헌신한 영국인인 조지쇼가 운영하던 회사이다. 쇼선생은 1907년 단둥에 무역회사 겸 선박회사를 설립하고 1919년 3.1운동부터 조선의 독립운동을 도왔으며 영국인이라는 신분을 이용, 독립운동에 필요한 독립자금 모집, 무기수입, 사무실 제공, 독립운동가의 왕래를 돕는 선편 제공을 했으며 일경에 체포되기도 한 인물이다. 백범 김구도 3.1독립만세운동 직후에 단둥에 도착하여 이륭양행의 배 계림호를 타고 상해로 망명하였다고 한다. 우리 일행은 외국인으로 인류애로 조선의 독립운동에 헌신한 조지 루이스 쇼 선생의 독립정신을 기리며 묵념을 올렸다.
(이륭양행터 앞에서묵념을 올리다.)
만주족마을 민박과 청석령고개
1352년 고려 공민왕때 요동정벌을 하러갈 때 지났다는 마천령고개를 넘어 산마루에 만주족마을인 요양시 첨수참 이가둔에 민박을 하게 되었다. 작고 아담한 이가둔 민박집 마당에서 서늘한 밤공기 속에 쏟아지는 달빛을 보며 열하일기 박지원을 생각해본다. 우리 일행은 통원보 전통시장에서 사온 포도, 자두, 복숭아 등을 먹으며 주인 가족과 몸짓 발짓 대화를 하며 웃음꽃을 피웠다. 좌식방이 있는 만주족 가옥에서 푹 자고, 이튿날 새벽 마을 한바퀴를 돌며 마을을 관찰하니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집집마다 옥수수를 보관하는 부경이라 부르는 창고가 있고 가축으로는 양을 기르고 있었다. 큰만두 하나로도 충분한 아침 식사를 하고 마침내 1637년 소현세자와 수십만이 되는 조선 포로가 넘었으며 조선사신단과 연암이 넘었다는 청석령 고개로 향하였다.
지금은 석탄 광산 개발로 관계 차량만 다니는 청석령 고개를 우리 일행은 걸어서 고개 마루에 있는 도교사원(과거 관제묘)을 보고 다시 내려왔다. 완만하게 오르는 고갯길 변에는 아름다운 들꽃들이 반겨주고 푸른 구릉성 평원이 더없이 평온하다. 청나라 볼모로 잡혀가던 봉림대군이 청석령을 넘으며 읊었다는 애절한 시 ‘호풍음우가’를 길잡이 장현근선생이 소개해준다. 후에 효종이 된 봉림대군은 요동정벌을 꿈꾸며 아마도 이 고개를 넘던 심정을 떠올리곤 했으리라.
호풍음우가
봉림대군
청석령 디나거냐 초하구 어드매오
호풍도 차도찰샤 구즌비는 무스일고
뉘라서 내 행색 그려내어 님겨신 듸 드릴고
청석령의 암석층인 사암이 푸른 빛을 띠고 있어 청석령이란 이름을 얻었다는 답사를 3시간여 걸려 마치고 오니 동포길잡이인 윤선생이 시원한 맥주 한잔과 북어포를 건네준다.
(청석령 고개마루 도교사원에서)
(청석령 고개마루에서)
아! 백암성
백암성은 암석이 석회석으로 이루어져있어 흰색을 띠고 있다. 너른 요동평야 위에 저 멀리 태자하 강 옆에 고구려 백암성이 웅장한 모습으로 서있다. 남쪽 성벽은 천혜의 절벽으로 아래엔 태자하가 흐르고 있고 산허리를 타고 쌓아놓은 성벽이 멀리서도 잘 드러나 보였다. 서쪽 방면에 위치한 암주성 마을길을 통해 백암성 점장대에 올랐다. 마을 집들의 대부분은 백암성의 성돌로 울타리를 쌓아서 안타까움과 씁쓸함을 감출길 없었다. 그러나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백암성은 복원되고 있었고 그들의 역사로 편입시키려는 의도가 역력했다.
백암성은 645년 5월 고구려와 당이 벌인 전투로 유명한 곳이다. 그리고 당에 의해 함락된 백암성에서 1만 여명의 고구려인 포로가 잡혀간 아픈 현장이기도 하다. 난 백암성에 오르면서 고구려인의 숨결과 기상을 느꼈고 점장대에 올라 요동 벌판을 보는 순간 가슴속의 응어리가 씻겨 내려가는 카타르시스를 맛보았다. 아! 이 곳이 바로 우리 조상들의 삶의 터전이자 고향인 요동땅이구나 하는 생각이 저절로 느껴졌다. 이 곳 백암성 가까운 요양 지역이 재야 사학자들이 고증하는 고구려의 수도 평양이라고 보는 학설도 있다고 한다. 백암성을 내려오며 탁 트인 가슴으로 학창시절 즐겨 불렀던 ‘사나이’란 노래를 부르며 내려오니 산하에는 먹구름이 몰려온다.
{태자하가 흐르는 백암성 정상부근)
(백암성을 오르는 기행단, 성돌이 석회석이라 하얗다)
심양 남탑거리와 황고둔역
혼하강이 유유히 흐르고 고층빌딩이 어우러진 심양은 아름다웠다.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 수도였던 심양에는 병자호란을 겪으며 1637년 볼모로 끌려왔던 소현세자가 머물렀던 곳이고 수만명의 조선인 포로가 끌려 온지 며칠 만에 노예시장에 내다팔린 비운의 지역이다. 지금의 남탑거리가 당시 노예시장이 있던 곳이라고 했다. 이때 노예로 팔려가는 조선인 포로들의 통곡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고 하는 얘기를 들으니 가슴이 아려온다. 또한 여인들은 성노예로 팔려 참혹한 생활을 감당해야 했으며 고향에 돌아와서는 ‘환향녀’란 이름으로 멸시와 핍박을 당했으니 이 얼마나 비참한 일인가. 아직도 일제시대 위안부 문제를 제대로 풀지 못하는 대한민국이 부끄럽다. 남탑거리에 서서는 나라를 빼앗긴 민중의 고난과 한을 생각해보았다. 지금은 화려하게 도시화된 서탑 거리가 한인거리가 되어 한글간판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서탑거리 한 편에 조선 책을 파는 ‘조선문 서점’이 있었다. 우리 일행은 서점에 들러 책을 구입했는데 나는 윤희순의 25년 항일투쟁 발자취를 추적해서 기록한 ⌜불굴의 항일투사 윤희순⌟(료녕민족출판사) 제목의 책을 구입했다.
윤희순은 여성 독립운동가로 춘천 의병장 유홍석의 아들 유제원과 결혼하여 의병운동에 뛰어들었다. 1911년 중국 망명 후에는 군자금을 모으는가 하면, 항일 인재 양성을 위해 노학당을 설립, 수많은 독립투사를 길러냈다. 일제의 탄압으로 노학당이 폐교되자 중국인들과 함께 조선독립단을 조직하여 항일 투쟁을 전개하면서도 독립운동가 양성에 전력을 다했으며 온 몸으로 투쟁하다가 1935년 중국에서 숨을 거둔 불굴의 항일 투사이다. 우리 일행은 일제치하 독립운동가들이 이용했다는 심양의 황고둔역(봉천역 부근에 있는 작은 역) 앞에서 잠시 만주항일독립운동에 대하여 장현근선생의 강의를 들었다. 이회영일가, 유인석의병장 일가의 윤희순열사 등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드나들었다는 대흥정미소, 강산면옥, 서탑개고기집 등 생생한 운동사를 현장에서 들으니 목숨을 걸고 움직이던 독립투사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현재는 코리아타운이 된 서탑거리)
*황고둔역 앞 거리에서 장현근선생의 열강을 듣다)
(황고둔역 앞에서)
요양의 밤과 요동벌판
요나라(911-1125)시대 건립되었다는 거대한 백탑이 보이는 요양시내에서 이번 답사의 마지막 밤을 보내게 되었다. ‘요사’지리지에 의하면 고구려는 광개토대왕 때 평양으로 불렸던 원래 수도 요양으로 재천도 했다고 밝혀놓았다. 삼국사기에도 고구려 수도는 7번 천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우리가 배운 역사에서는 세 번 뿐이다. 고구려 성들이 요양의 백암성을 비롯 안시성, 요동성, 현도성 등이 요녕성에 띠를 이루고 있는 것만 보아도 요양은 분명 고구려의 중요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평양은 과연 어디일까? 정부차원에서 식민사관을 극복한 과학적인 고대사 연구에 적극적으로 나서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였다. 이번 기행의 회포를 풀며 즐거운 요양의 밤을 보내고 이튿날 요양박물관에 들러 고구려관을 자세히 관람하였다. 이윽고 귀국행 비행기를 타기위해 우리 일행을 태운 버스는 대련으로 향했다. 이 날은 마침 광복절이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광활한 요동벌판을 바라보니 말을 타고 달리는 고구려인들과 항일독립운동가와 서간도 동포들의 모습이 스친다. 버스 안에서 나눈 소감에서 참가 교사들은 ‘이 땅의 교사로서 여전히 국사교과서에 남아있는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사명감을 가지고 올바른 역사교육과 미래를 준비하는 지식인이 되자.’고 뜨겁게 다짐하였다. 전북교육의 희망과 나라의 미래를 만들어가는 ‘발해 요하만 기행’호에 함께 탑승할 수 있도록 모든 일정을 준비하고 진행해준 집행부 선생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요양박물관앞에서 순창고 장교철선생님, 길잡이 장현근 선생님과 함께)
(5받6일의 대장정을 마치고 인천공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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