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활동 후기

"조선의 딸, 총을 들다"를 읽고

이미영전북 2018. 7. 31. 11:10

"조선의 딸, 총을 들다"(정운현 지음)

수많은 여성들이 의병운동과 항일독립투쟁에 나섰지만 그동안 역사속에 묻혀 있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항일무장투쟁에 나선 여성들은 더 그러했을 터이다. 

몇 년전 영화 '암살'에서 여성독립군 저격수인 안윤옥이 나오면서 여성독립운동가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도 높아졌다.

마침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집중 조명한  이 책이 세상에 나와 조금이나마 갈증을 해소해준다.

앞서간 선배 여성독립투사들의 치열했던 삶을 읽노라니 사상 유례없다는 무더위도 잊을 수 밖에 없구나.

책에서 다룬 스물 네분의 여성독립운동가 중에서 몇 분의 삶만 짧게 정리해본다.


* '여자 안중근' 남자현

영화 '암살'의 안윤옥(전지현 분)의 실제 모델이었던 남자현.(1872~1933)

남자현은 소위 양반집 가문인 안동에서 태어나 열아홉에 영양으로 시집을 갔다.

그러나 남편인 김영주가 1895년 을미사변 이후 일어난 의병부대에 가담, 전투에서 사망하자 독립운동에 온몸을 던진다.

유복자를 키우던 남자현은 1905년, 부친이 의병부대를 조직하자 의병 조직과 일본군 동태파악에 나선다.

46살에 서울로 올라온 남자현은 3.1운동에 가담하였다.

남자현은 3.1만세운동에서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에 맞설 수 있는 무장항쟁의 필요성을 느끼고,

1919년 중국 요녕성 통화현으로 아들을 데리고 망명하여 서로군정서에 가입한다.

아들 김성삼을 신흥무관학교에 입학시켜 독립군 교육을 시켰다.

남자현은 1926년  순종이 승하하자 초대 조선 총독인 사이토 마코토가 창덕궁에 조문을 올 것을 알고 사이토를 처단하기 위해 창덕궁 주변 탐색에 나선다.

그러나 같은 목적으로 미리 거사를 한 송학선 의사가 실패하자 할 수 없이 만주로 되돌아간다.

1931년엔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제를 조사하고자 만주에 온 국제연맹 조사단장 '리튼'에게 남자현은 왼손 무명지 두마디를 잘라 '조선은 독립을 원한다'라고 혈서를 쓴 후 무명지와 함께 보냈다.

1933년 봄, 일본 관동군이 세운 괴뢰정부 만주국 건국기념일에 관동군사령관 무토 노부요시 육군대장이 참석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남자현은 무토를 처단하기로 결심한다. 61세의 남자현은 몸에 권총과 폭탄을 숨기고 하얼빈역으로 가던중 밀정의 밀고로 일경에 체포당한다.

하얼빈 일본영사관 감옥으로 끌려간 남자현은 혹독한 고문으로 6개월을 보내면서도 단식투쟁으로 일제에 항거하다 인사불성이 된 상태로 보석으로 풀려났으나 닷새만에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하였다.

독립군의 어머니로 불렸던 남자현은 1967년 하얼빈에서 국립묘지로 이장했다.


*여성 의병장이자 민족교육운동가인 윤희순

윤희순(1860~1935)은 지난해 서만주를 답사하던중 심양의 조선인 서점에서도 그녀의 전기를 구입해 읽은 적이 있다. 

1860년 서울에서 태어난 윤희순은 열 여섯에 춘천 유제원과 혼인하였는데 의병장 유인석 문중이었다.

1895년 을미사변이 나자 시아버지 유홍석이 의병장으로 의병을 일으키자 윤희순도 나서서 군자금을 모으고 탄약제조소를 직접 운영하였다.

윤희순은 마침내 1907년에 여성의병대를 조직하여 직접 전투에 나서기도 하며 구국운동에 앞장섰으나

1910년 일제에 의해 나라를 잃자 온가족과 함께 요녕성으로 이주한다.

윤희순은 요녕성 환인현에서 군자금을 모으는 등 독립투쟁을 돕다가 우당 이회영 등의 도움을 받아 독립운동가를 기르는 민족학교 건립에 나선다. 

윤희순이 세운 학교는 동창학교 분교 '노학당'으로 1915년 일제의 탄압으로 폐교될 때까지 약 50여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하였다. 

이후에도 윤희순은 조선독립단과 조선독립단가족부대를 조직 군사훈련을 한다.  이때 그녀의 나이 55세였다고 하니 얼마나 장한 일인가.

1935년 윤희순의 장남 유돈상이 항일투쟁을 하다 일졍에 체포되어 고문으로 순국하니 윤희순도 아들이 떠난지 11일만에 75세로 그 뒤를 따른다.

만주로 망명한지 24년째, 남편과 아들이 조국의 독립투쟁을 하다 떠난 만주에서 그녀도 항일투쟁가로서 생을 다한 것이다.   

윤희순의 동상은 현재 춘천시립도서관 뒤편 주차장에 외롭게 서있다고 한다.


*여성광복군의 맏언니 오광심

오광심은(1910-1976)은 1940년 9월17일, 중국 중경에서 창설한 광복군 창설식에 참석한 30명 대원중 한명이다.

오광심은 선천에서 태어나 1910년 부모를 따라 남만주로 이주하여 그 곳에서 학교를 다니며 항일정신을 교육받았다.

1929년 오광심은 민족학교인 배달학교와 동명중학 부설 여자국민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배달학교 교사시절 조선혁명당에 가입하게 된다.  

오광심은 만주사변이후 교사를 그만두고 유격대 및 한중연합 항일전에 참여하였고 신흥무관학교 출신으로 용정 동명중학교 교장 출신인 김학규와 결혼하여 평생을 동고동락하였다.

남경으로 피난길에 오른 임시정부에 김학규가 조선혁명군 측으로 파견되자 1934년 먼거리 남경까지 일경의 검문을 피하기 위해 오광심은 200쪽 보고서를 통째로 외워서 갔다고 한다.

광복군은 창설 두 달 후에 중경에서 서안으로 옮겼으며 오광심은  기관지 '광복' 제작 임무를 맡았으며 1942년에는 산둥반도로 배속되어 항일투쟁을 하였다.

1944년 들어서면서 학도병들이 일본군에서 탈출해 광복군에 합류해오면서, 오광심은 대원 관리와 교육을 맡았다.

해방된 후에도 오광심은 남편과 함께 상해에 남아 교포들의 셍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귀국을 돕다가 1948년 4월, 마침내 조국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1949. 6.26 백범 김구가 흉탄에 쓰러지자 한독당 조직부장이던 남편 김학규는 군법회의에 회부돼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복역하기도 한다. 

대륙을 누비던 여성광복군 오광심은 1976년 세상을 떠났으며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정운현.<조선의 딸 총을 들다> 인문서원, 2016. 발췌 요약